과거일기장

함박눈 속에서 아저씨와 하루종일 데이트를 하게 된 사연

죠니워커 2006. 10. 10. 22:34

2001년 1월 9일

 

이번주부터 울산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되어있었다.
사실 지난주부터 시작했었어야 할 일이지만
이 프로젝트에 필요한 기술을 입수하느라 일본출장을 다녀오느라 한주가 연기된 터였다.
그래서 더이상 연기하면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어제 오전 비행기가 전혀 운항이 되지 않아
어쩔수 없이 그쪽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하루를 또 연기하였다.
오후에 눈이 좀 녹고 도로 사정이 좋아지자 나의 팀장이 컴퓨터를 차에 싣고 울산으로 혼자 출발하였다.
실무자들은 고생을 하면 안된다며 고생은 혼자 하겠다며.
(참으로 분위기 좋죠?)
나와 동료 한명은 그 다음날(오늘) 비행기를 타고 가기로 하였다.

오늘 아침 새벽같이 동료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무래도 비행기가 결항될 것 같으니 아예 서울역으로 가서 열차를 타자는 것이었다.
나는 어제 오후에 비행기 운항이 제개된것을 알기에 비행기를 타기를 주장하였고
결국 우리는 오전 8시에 공항에서 만났다.
공항버스를 타고가며 졸다가 공항에서 깨어보니 이게 왠일인가.
세상이 온통 하얗게 덮힐 정도의 눈이 또 내리는게 아닌가.
순간적으로 오늘의 운명을 예감하였으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청사로 들어섰다.
비행기를 포기하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공항청사에서 열차표를 알아본 결과 저녁 6시30분 울산행 새마을호를 구하게 되었다.
이제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시간을 때워야 할 입장이 되었다!

같이 있던 동료와 잠시 의견을 나누었다.
그시간에 사무실에 돌아가 일을 하는건 둘다 반대였다.
갑자기 이렇게 시간이 비어서 사무실에 간다고 일이 손에 잡힐리 없고
사실 사무실에 가도 머무를 시간이 길지 않았으며
차라리 이럴때 시내에서 놀자는게 둘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고리타분한 동료가 아니라 천만다행이었다.

우리는 공항버스를 타고 삼성동 코엑스 쪽으로 이동하였다.
작년에 사무실을 옮기기 전까지 공항터미널 앞에서 근무한터라
코엑스가 놀기 좋은곳이라는걸 알고 있었다.
공항버스를 타고 눈보라가 휘날리는 올림픽대로를 달리며
옆자리의 이 사람이 여자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똑같이 시커먼 아저씨 둘이서 하루종일 같이 붙어서 놀 생각을 하니 갑갑하였다.
아마도 이 생각은 서로 똑같이 하였겠지.
그리고 이 생각은 하루종일 지속이 되었다.

코엑스의 메가박스에 가서 영화시간을 알아보고 시간이 맞지 않아 삼성동 거리를 걸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테헤란로는 참 아름다웠다.
옛날 언젠가 이런 길을 걸었던 기억들이 새삼 떠올랐다.
다만 지금 같은 우산을 쓰고 옆에 꼭 붙어서 다니는 이 사람이
서로 거북해하는 아저씨만 아니라면...

메가박스에서 아놀드 슈왈츠네거가 나오는 6번째날을 봤다.
복제인간에 대한 테마로 꾸며진 블록버스터였다.
영화를 보며 나도 저 영화에서처럼 클론(복제인간)을 만들어 울산으로 보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나는 집으로 가서 잠이나 실컷 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클론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사실 그동안 살면서 종종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이제 영화를 다보고도 시간이 무지 남아서
베스킨라빈스에서 아이스크림도 하나씩 먹고
(남들 보면 사귄다고 오해할까봐 각자 따로 컵을 사서 먹었다.)
피시방이나 찾아보자고 테헤란로를 헤메다가
어렵게 한군데를 발견하고 지금 들어와있다.
아이스크림 먹다가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 학생 차림의 젊은이들 아니면 연인들이었다.
얼마전 IMF때 직장을 잃은 가장들이 집에는 출근한다고 이야기하고 무작정 집을 나서서
바바리코트에 정장을 하고 관악산을 올라가는 사진을 신문에서 본적이 있다.
나도 직장에서 짤리면 그렇게 될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아까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느낀 그런 느낌.

아직도 한시간반이 남았다.
지금 옆자리에서 인터넷에 열중하는 나의 동료와
새마을호를 5시간 함께 옆자리에 앉아 타고가서
함께 여관에서 잠도 잘것이다.
이제 동료가 여자가 아니라고 너무 구박하지 않도록 하자.
어쨌든 내일부터 같이 머리를 맞대로
여러가지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 프로젝트를 함께 이끌고갈 동료가 아닌가.

이제 서울역으로 출발하여야 한다.
눈이라도 좀 그치면 좋겠다...
내일 울산가면 무슨욕을 들어야 할까...

 

2006년 10월 10일

 

위의 글에 나오는 나와 데이트를 한 아저씨는 나중에 회사를 옮기셨고 지금 우리와 긴밀한 관계의 협력사에 계시고

고집스럽게 컴퓨터를 차에 싣고 울산으로 내려가신 팀장님은 지금도 같이 근무하고 계신다.

 

'과거일기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지스와 존트라볼타  (0) 2007.05.01
오스트레일리아...  (0) 2006.10.18
중국요리에서 바퀴벌레가 나왔을때...  (0) 2006.10.10
나의 옛 사수의 승진  (0) 2006.10.10
새벽 두시... 고속도로  (0) 2006.10.10